[장준하] 장정에서 사상계까지 <역덕이슈 오늘>

재생 0| 등록 2017.08.28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 아래에서 한 남자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그는 광복군이자 언론인이자 사회운동가이자 …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 아래에서 한 남자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그는 광복군이자 언론인이자 사회운동가이자 정치가, 민주투사였던 장준하 였습니다. 1945년 1월 충칭에 있던 임시정부에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청년들이 도착합니다. 6개월 전 일제에 의해 학도병으로 징집된 후 중국에서 일본군 부대를 탈출한 장준하가 그의 동지들과 함께 혹한과 배고픔을 뚫고 장장 6천리를 걸어 마침내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한 것입니다. 임시정부에서 장준하는 시안의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미국 OSS가 주관하는 한미합작 특별군사훈련을 받고, 국내진공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항복으로 작전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김구 주석의 비서로 일하던 장준하는 1945년 12월 김구와 함께 귀국합니다. 광복 후 장준하의 화두는 ‘민주’였습니다. 그는 언론인이자 정치인, 재야민주인사로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습니다. 그가 창간한 잡지 <사상계>는 이승만 독재정권에 가장 껄끄러운 존재였고,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1967년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되는 등 모두 10여 차례 투옥을 겪었습니다. 10월유신 이후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 청원 백만인서명운동’을 주도하면서 유신반대운동에 앞장선 장준하.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박정희 정권은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하고, 15년 형을 선고합니다. 6개월 후 지병 악화로 풀려난 다음에도 장준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유신헌법 개정과 민주화를 촉구합니다. 그러던 중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는 돌연 경기도 포천 약사봉 인근 계곡에서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유일한 목격자의 진술과 검안 의사의 소견에 따라 그의 죽음은 실족에 의한 추락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인에 대한 의구심이 끊이지 않았고, 타살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마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거나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1988년부터는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풀기 위한 조사가 몇 차례 이뤄졌지만 명확한 결론을 내지는 못했습니다. 2012년 여름, 비로 인해 묘지 석축이 무너지자 묘지를 이장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장 과정에서 드러난 유골은 머리 옆 귀 뒤쪽에 망치로 가격당한 듯한 원형함몰이 뚜렷했습니다. 즉시 ‘장준하 선생 암살의혹규명 국민대책위원회’가 발족되었고, ‘장준하 선생 사인진상조사 공동위원회’를 구성하여 재조사에 착수하였습니다. 이듬해 3월 26일 발표한 이정빈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의 결론은 타살 후 추락이었습니다. 하지만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대한법의학회는 감정위원회 이름으로 반대의견을 내면서 추락사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여전히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영상물 등급   모든 연령 시청가
방영일           2017. 08. 28
카테고리       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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