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독립 운동가들] 남성 독립투사들의 든든한 동반자이자 조력자 <역덕이슈 오늘>

재생 0| 등록 2018.03.12

3.1운동은 여성들도 항일투쟁의 전면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성들은 의열무장투쟁의 투사로, 민족교육활동가로, 그리고 …

3.1운동은 여성들도 항일투쟁의 전면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성들은 의열무장투쟁의 투사로, 민족교육활동가로, 그리고 민족해방전쟁의 전사로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합니다. 그 중에는 스스로 독립운동에 나서는 것은 물론, 단체의 살림살이를 책임지고 요인들의 수발을 드는 등, 일인다역을 해내며 헌신한 분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남성독립운동가 옆에서 든든한 동반자이자 조력자로 활약한 여성들입니다.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인 신채호의 아내, 박자혜. 조선총독부 부설병원의 간호사였던 그녀는 3.1운동 이후 부상당한 조선인들을 치료하며 독립운동에 나서게 됩니다. 간호사 단체인 <간우회>를 조직해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그녀는 이 일로 간호사를 그만두고 중국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1920년 신채호와 결혼한 후로는 극심한 빈곤과 일제의 탄압 가운데도 남편의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신채호가 의열단에 가담한 후에는 의열투쟁의 조력자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1926년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져 세상을 놀라게 한 나석주 의거, 이때 나석주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길 안내를 맡았던 이가 바로 박자혜였습니다. 박자혜가 남편 신채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1927년이었습니다. 이듬해 일제에 체포된 신채호는 형기를 2년도 채 남겨놓지 않은 1936년, 감옥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혼자서 두 아들을 키워야했던 박자혜는 ‘삼순에 구식으로 삼모자 겨우 연명’(한 달에 아홉 끼로 세 모자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고 신문에 날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습니다(동아일보 1927.12.12.). 영양실조와 폐병으로 둘째 아들이 사망한 2년 후인 1944년, 박자혜도 단칸 셋방에서 쓸쓸히 숨을 거뒀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 고문이었던 김가진의 맏며느리 정정화. 그녀는 먼저 상하이로 망명한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홀로 임시정부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열악한 임시정부의 재정상태를 알게 된 후에는 국내에 잠입해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겠다며 다시 국내로 들어옵니다. 일제의 삼엄한 검문과 체포 위험에도 불구하고 6차례나 상하이와 국내를 오가며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고 전달했습니다. 윤봉길 의거 이후 일경에 쫒겨 피난길에 나선 임시정부와 끝까지 동행해 중경까지 갔고, 남목청 사건으로 부상을 입고 생사를 오가던 김구를 극진히 간호해 살려내기도 했습니다. 온갖 궂은일을 마다않고 일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정정화, 그녀는 임시정부의 안주인으로 불렸습니다. 독립운동계의 중진 현익철의 부인이었던 방순희, 그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의 마지막 여성의원이기도 했습니다. 남목청 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후에도 그녀는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으로 임시정부의 대소련 외교활동을 담당했으며 대한애국부인회 부주석에 임명돼 광복군 참여를 독려하는 선무공작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부인으로, 딸로, 여동생으로, 그리고 어머니로,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여성독립운동가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입니다.

영상물 등급   모든 연령 시청가
방영일           2018. 03. 12
카테고리       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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