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양원년] 을미개혁과 상투전쟁 <역덕이슈 오늘>

재생 0| 등록 2018.01.04

1895년 11월 16일이 저물고 다음날이 밝았을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날은 11월 17일이 아니라 1896년 1…

1895년 11월 16일이 저물고 다음날이 밝았을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날은 11월 17일이 아니라 1896년 1월 1일이었습니다. 김홍집 친일내각이 단행한 ‘을미개혁’으로 태양력을 사용하게 되면서, 11월 17일부터 12월 말까지의 시간이 사라지고 바로 이듬해 1월 1일이 된 것입니다. 연호도 양력을 도입한다는 뜻인 ‘건양(建陽)’으로 지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남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단발령이 내립니다. 태양력 도입으로 날짜를 자름과 동시에 조선 백성들의 상투도 자르려고 든 것입니다. 먼저 고종과 태자가 단발을 했고, 머리를 깍은 순검과 병사들로 체두관(剃頭官)을 임명해 전국에 파견했습니다. 단발령에 저항하며 도망치는 백성들을 잡아 강압적으로 단발을 집행하는 꼴사나운 풍경이 도처에서 펼쳐졌습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단발령은 조선의 근간인 유교의 ‘효’ 사상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유림의 거두 최익현을 비롯해 학부대신 이도재 등 유생들의 단발령 반대 상소가 빗발쳤습니다. 그리고 의병이 일어납니다. 을미사변 이후 높아진 반일감정에 단발령이 기름을 부은 격이었습니다. 명성왕후 시해에 대한 복수와 단발령 철회를 요구하는 유생들이 주도하는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고종이 단발령을 내리고 먼저 단발을 한 것이 임금 스스로의 뜻이 아니라 일본의 위협에 따른 부득이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결국 단발령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896년 2월, 고종은 친일내각인 김홍집 내각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합니다. ‘아관파천’입니다. 총리대신으로 ‘을미개혁’을 주도했던 김홍집은 성난 군중에게 피살되었습니다. 단발령은 이듬해 8월 공식적으로 철회되었습니다. 하지만 단발령은 짧은 기간에 조선인들의 삶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이전에는 영혼을 빼앗긴다며 기피하던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사진관은 연일 문전성시를 이뤘습니다. 단발하기 전에 상투 튼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단발 후 머리를 관리하려는 사람들로 일본인 이발소들이 호황을 맞기도 했고, 단발에 어울리는 서양 의복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친일내각에 의한 강압적이고 급진적인 ‘을미개혁’은 미완으로 끝났지만, 조선사회는 이미 바야흐로 근대로 진입하고 있었습니다.

영상물 등급   모든 연령 시청가
방영일           2018. 01. 04
카테고리       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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