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숙] 마지막 진정한 선비 <역덕이슈 오늘>

재생 0| 등록 2017.11.23

1905년 11월, 한 장의 상소가 대한제국 황제 고종 앞으로 날아듭니다.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 을사늑약 체결에 동조한 …

1905년 11월, 한 장의 상소가 대한제국 황제 고종 앞으로 날아듭니다.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 을사늑약 체결에 동조한 을사오적의 목을 베라는 상소였습니다. 상소문을 올린 사람은 유림 지도자 심산 김창숙이었습니다. 이 일로 김창숙은 체포되어 옥고를 치릅니다. 김창숙은 양반 중심의 신분질서를 청산하고 전 민족적 구국운동을 이뤄내야 한다고 주장하던 혁신적 유학자였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국권회복과 항일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앞의 ‘을사오적 매국 성토사건’ 이후에는 친일단체인 ‘일진회’ 성토의견서를 냈다가 다시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3.1운동 이후에는 전국의 유림대표들이 서명한 ‘파리장서’를 가지고 상하이로 가,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보냅니다. ‘파리장서’는 조선의 자주독립 보장을 국제사회에 청원하는 독립청원서였습니다. 이후 그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1926년에는 의열단원 나석주의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 폭탄투척 의거를 지원했습니다. 이로 인해 일제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두 다리를 못 쓰게 됐지만, 심산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광복. 하지만 그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심산은 또 다른 적과의 싸움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이번에 그의 적은 이승만이었습니다. 김창숙은 독재자 이승만을 향해 칼날 같은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그러자 이승만의 보복이 이어집니다. 1952년 이승만이 대통령 재선을 위해 벌인 부산 정치파동 이후 일어난 국제구락부 사건, 직선제 개헌을 저지하기 위해 야당과 재야의 인사들과 함께 구국선언을 하던 김창숙은 정치깡패들의 습격으로 부상을 당합니다. 또한 해방 후 그가 다시 일으켜 세운 유림조직 유도회와 그가 설립한 성균관대학 총장직도 이명세 등 친일유림을 앞세운 이승만에 의해 강탈당합니다. 그럼에도 김창숙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가 병상으로 김창숙을 찾아왔을 때 일입니다. 박정희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김창숙은 벽을 향해 훽 돌아누워 외면해 버렸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일본군 장교 출신에,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한 치의 타협도 없는 마지막 선비다운 면모였습니다. 한평생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일제에 항거하고, 독재자를 향한 반독재투쟁에 앞장섰던 심산 김창숙. 민족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행동으로 옮겼던 그는 진정한 선비였습니다.

영상물 등급   모든 연령 시청가
방영일           2017. 11. 23
카테고리       교양

더보기

당신이 좋아 할 만한 영상

  • TV조선
  • MBN
  • CHANNEL A
  • Jtbc
  • CJ ENM
  • KBS
  • MBC
  • S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