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 우리의 힘과 피로 싸운다 <역덕이슈 오늘>

재생 0| 등록 2017.09.12

1920년 9월 14일 부산경찰서에서 폭탄이 터져 경찰서장 하시모토가 사망합니다. 그로부터 한 해 뒤인 1921년 9월 12…

1920년 9월 14일 부산경찰서에서 폭탄이 터져 경찰서장 하시모토가 사망합니다. 그로부터 한 해 뒤인 1921년 9월 12일에는 서울 왜성대 조선총독부에서 폭탄이 터집니다. 각각 26살의 청년 박재혁과 27살의 청년 김익상이 일으킨 의거였습니다. 두 사람은 의열단 단원이었습니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에서 김원봉의 주도로 조직된 항일비밀결사입니다. 의열단의 독립투쟁노선과 강령은 일명 <의열단선언>이라고도 불리는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당시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노선이었던 문화주의·외교론·준비론 등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폭력적 민중혁명에 의해 일제를 타도함으로써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것입니다. 의열단은 구체적으로 ‘5파괴 7가살’이라는 행동목표를 두기도 했는데, ‘5파괴’는 ①조선총독부 ②동양척식회사 ③매일신보사 ④각 경찰서 ⑤기타 왜적 중요기관 등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관들이었고, ‘7가살’로는 ①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군부 수뇌 ③대만총독 ④매국노 ⑤친일파 거두 ⑥밀정 ⑦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등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의열단의 첫 의거는 1920년 3월에 시작되었습니다. 그해 3월부터 6월까지 모두 3차례에 걸쳐 국내로 폭탄 반입을 시도했는데 번번이 실패하고, 도합 30명 넘는 관련자들만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첫 거사의 좌절을 딛고 두 번째로 시도했던 의거가 바로 9월 12일에 있었던 부산경찰서폭탄투척 사건이었습니다. 이 의거로 경찰서장을 비롯하여 일제 경찰 3명이 즉사하였습니다. 다음 의거는 부산경찰서 폭탄투척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3개월 후였습니다. 이번에는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는데, 한 발은 불발되고 다른 한 발은 빈 복도에서 터지는 바람에 일본경찰에게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의거가 조선총독부폭탄투척 의거였습니다. 약 1년 후인 1921년 9월 12일, 서울 남산 밑 왜성대 총독부 청사 2층에 폭탄 두 개가 투척되어 건물 일부가 부서졌습니다. 일본 경찰은 범인색출에 혈안이 됐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전기수리공으로 변장하고 정문을 통해 총독부 2층까지 올라가 폭탄을 던진 김익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와,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과 신의주를 거쳐 북경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해인 1922년 3월 28일, 상하이 황포탄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저격사건이 있었습니다. 오성륜이 제1선, 김익상이 제2선, 이종암이 제3선을 맡아 결행했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붙잡힌 김익상이 실토하고 나서야, 일제는 전 해에 있었던 조선총독부 폭탄투척사건의 진상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의열단의 의열투쟁은 계속 이어집니다. 1923년에는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과 삼판통 효제동 의거가 있었고, 1924년 1월에는 김지섭이 동경 니주바시에서 일왕궁 폭탄투척 의거를, 1926년 12월 28일에는 나석주가 동양척식회사 및 조선식산은행 폭탄투척의거를 벌입니다.

영상물 등급   모든 연령 시청가
방영일           2017. 09. 12
카테고리       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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